지난 시간에는 쿰란 문서가 발견된 경위와 이 쿰란 문서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쿰란 지역의 지리적인 모습과 당시의 시대 배경, 그리고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통해 쿰란 공동체의 신앙적인 정체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쿰란 공동체가 존재했었던 시대적 배경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대로 쿰란 공동체는 유대 광야 사해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쿰란 공동체가 위치해 있는 그 광야라는 공간의 자리 그 자체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전과의 철저한 괴리성이다. 쿰란 공동체는 신앙적인 공동체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거하는 자리는 분명 예루살렘 성전 밖이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것처럼 유대교의 시작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기반한다. 이 때부터 물리적인 성전은 영원한 것이 아닐수도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그보다 영원한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적인 방향성(즉, 유대교의 시작)이 도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전히 앞을 알 수 없는 혼돈 가운데 계속되게 된다. 바벨론 포로기에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그 다음으로는 헬라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는데, 이후 이스라엘과 그 주변 중동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문화는 바로 헬레니즘 문화였다.
헬레니즘 세계
알렉산더 대왕
헬레니즘의 시작
헬라제국을 일으킨 이는 10대의 나이에 마게도냐의 왕으로 등극하여 20대에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는 드넓은 세계 제국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로서는 고도로 발달한 헬라 철학과 문화와 언어 등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통합된 사상과 철학 체계를 형성함으로 자신의 제국 경영과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헬레니즘은 당시 유다 사회 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다 지역 밖에서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헬라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히브리어 사본보다도 더 오래된 사본 전통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70인역 성경도 기원전 3-2세기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위대한 유대 철학자 필로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따라서 당시 헬레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유대 제사장들이 주도하여 헬라식 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을 예루살렘에 세우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336-323 BCE)이 마땅한 후사를 남겨 놓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죽자 헬라 제국은 그의 휘하 장군들에 의해 사분오열되는데 유다를 먼저 통치했던 왕조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기반을 둔 프톨레미 왕조(301-200)였고, 이후에는 시리아의 다메섹에 기반한 셀류커스 왕조(200-167)가 이스라엘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사실, 헬라 영향권 아래에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헬라 왕조의 왕들과 친선관계를 순조롭게 유지하였고,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보수하는 비용까지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친선 관계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왕 때에 이르러 극도로 악화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의 종교 제의와 전통을 금지했으며 성전을 돼지피로 훼손하는 등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기에 이른다.
혼란스러운 이스라엘의 리더십
한편, 헬레니즘 시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어떠하였는지 잠시 살펴보자. 헬라시대가 시작될 무렵 느헤미야 12:11에 언급되어 있는 얏두아의 아들, 오니아스(히.호니야) 1세가 대제사장직을 맡게 되었고(309-265 BC?), 오니아스 가문이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직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기류는 안티오쿠스 4세(175-164)의 통치 시대 때에 변하기 시작한다. 당시 셀루커스 왕조 치하에 있던 유다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 3세였는데, 마카베오하 4장에 따르면 당시 오니아스는 내분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의 동생 야손은 막대한 뇌물을 왕에게 전달하고 자신이 대 제사장직(175-172 BC)을 가로챈다. 야손은 이후 급격한 헬라화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마카베오서는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헬라화를 적용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크게 사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자신의 형을 몰아내고 대제상직을 차지했던 야손도 자신이 왕에게 사신으로 보냈던 메넬라오스에 의해 배신을 당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왕에게 사신으로 갔던 메넬라오스는 막대한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고 돌아온다. 여기서 메넬라오스의 정체가 좀 애매하다. 그는 시몬의 동생으로 언급되는데, 마카베오서는 시몬을 오니아스 3세에게 대적했었던 인물로 언급하지만, 요세푸스는 시몬을 오니아스 3세의 아버지 시몬 2세로 보고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요세푸스가 혼동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요세푸스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메넬라오스가 대제사장직을 찬탈함으로 사독계열의 대제사장 전통이 깨어져 버린 것이 된다.
메넬라오스는 대제사장으로 봉직하는 동안(72-165 BC) 오니아스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성전 기물들을 횡령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이집트 원정 가운데 전사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대사장의 자리에서 쫓겨났던 야손이 군대를 몰고 와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무위에 끝나 버리고, 오히려 이를 반란이라고 여겼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군대를 몰고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훼손하고 모욕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가운데 메넬라오스가 적극 동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카비 혁명의 시작, 그리고 사라진 대제사장
이러한 에피파네스 4세의 악행은 급진적인 헬라화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마카비 가문의 공분을 샀고, 기원전 167년에 이후 근 20여년에 걸친 기나긴 마카비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마카비 가문이 일으킨 반란 전쟁은 167-16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160년경 엘라사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의 군대가 승리를 거둠으로 드디어 유다의 독립을 성취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후로 친헬라파와 마카비 가문 사이의 내전과 갈등, 그리고 헬라 제국의 개입이 계속되다가 기원전 140년경이 되어서야 진정한 독립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하스모니안 왕조는 유다 마카비가 대제사장이 되었던 기원전 165년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스모니안 왕조 초기에는 여전히 헬라제국의 영향 속에 있었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지위를 사용하지 못했으며(여기에는 메시아관의 영향도 있었을 것), 이들이 권력을 주장하기 위해 가질 수 있었던 자리는 바로 대제사장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쿰란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마카비 혁명을 전후로 한 대제사장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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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ias III, son of Simon II, (?-174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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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son of Simon II, 175-172 BC (아마도 마지막 사독 계열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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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elaus, 172-165 BC (친 헬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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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as Maccabeus, son of Mattathias, 165-162 BC (성전 정화 후 대제사장이 되지만, 이후 헬라 왕조에 의해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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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imus, 162-159 BC (친 헬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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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에 대한 기록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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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Apphus, 153-143 BC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 대제사장)
위 대제사장의 계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알키무스 제사장 이후, 요나단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아푸스(Jonathan Apphus)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 약 6년간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이 시기에 완전히 대제사장의 자리가 공백이었는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였으나 부당하게 축출당해 그 기록마저 남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때 축출당했던 대제사장이 쿰란 공동체를 창설했던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ness, מורה צדק)가 아닐까하고 제안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의의 교사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요나단 아푸스는 “악한 제사장”(wicked Priest)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대제사장직 역시 마카비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쿰란 공동체가 시작된 때가 기원전 160년 경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등지고 광야에 나가서 살게된 쿰란 공동체가 하스모니안이 점유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에세네파
위와 같은 시대로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안에는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했었다. 대표적인 분파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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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딤(חסידים): 하시딤은 “경건한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외경(마카베오상 2:42; 7:13; 마카베오하 14:6)에서 언급된다. 이들은 마카베오 혁명을 함께 도왔던 자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이 성공하고 하스모니안 왕조가 들어선 이후, 내분과 종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하스모니안 왕조와 하시딤은 결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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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파(Pharisees): 이 때 하시딤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종파를 형성한 이들이 바로 바리새파(”분리”를 의미)이다. 이들은 성서를 해석하는 전통을 수립하였으며, 문서 전통 뿐만 아니라 구전 토라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내세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 운명론적인 입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의 주류 세력이 된다. (요세푸스 - 약 6,000여명 정도의 규모. 과반수 이상이 갈릴리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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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파(Saducces): 사두개인들의 기원은 매우 모호하다. 이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제사장 계열의 종파로 생각되며, 당대의 종교 엘리트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요한 힐카누스의 조언자로 나타나 주도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기록된 성문 토라만을 받아들였고, 성서에 대한 해석을 금하였다. 따라서 내세나 부활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전과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들은 국수주의적이고 반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헤롯 시대 때 서서히 몰락해 가다가, 성전의 파괴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요세푸스 - 수백 명 정도 규모 - 예루살렘과 인근 유대 지역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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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원(Zealots): 이들은 기본적으로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들은 급격하게 헬라화되어가는 당시의 상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이들은 결국 로마에 대항하는 군사 조직을 만들게 되어 유대 1차, 2차 반란 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요세푸스 - 수백 명 정도 규모 - 대부분 갈릴리 지역에 거주)
이 종파들 외에 로마의 지질학자 플리니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에세네파(Essenes) 공동체에 관한 기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사해] 서편, 에세네파는 불결한 해안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정착했다. 이들은 온 세상의 이들의 존경을 받는 특별한 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없었고, 남녀 관계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돈도 가지지 않고, 가진것이라고는 대추야자 나무들 뿐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매일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거듭났다. 오락가락하는 운명에 지친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관습을 받아들인다. 믿기지 않지만 수천세기동안 아무도 출생하지 않은 인종이 존재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 유익한 것은 과거의 삶에 대한 회개이다. 에세네 아래쪽에는 엔가다[엔게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풍요와 야자수림에 있어서는 예루살렘 다음이었다. 오늘날에 이 곳은 잿더미가 되었다. 여기를 지나면 바위 위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곳은 아스팔트 호수(사해) 근처에 있다.
(플리니, Natural History 5.73)
실제 유대인들 가운데 3개의 철학 학파들이 있었는데, 첫번째 그룹은 바리새인들이고, 두번째 그룹은 사두개인들이며, 성스러운 특별한 삶을 일구어가는 것으로 존경받는 세번재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에세네(Essenes)라고 불리운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119)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러한 에세네파 공동체는 4,000여명의 규모로 예루살렘과 유다 인근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철저히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했으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과 절차들을 이행해야만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규율 문서와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들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쿰란 공동체에 살았던 이들이 에세네파의 핵심 구성원들이라 여겨지고 있다. 아마도 에세네파는 요세푸스가 언급한 대로 예루살렘과 유다 근처에 다양한 공동체를 일구며 살았을 것이며, 그 가운데 핵심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쿰란이었을 것이다.
3. 쿰란 공동체의 규율
그렇다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쿰란 공동체의 흔적을 통해 그들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것처럼 쿰란 공동체는 유다 광야에 위치해 있다. 쿰란 유적지 근처에서 대량의 사해 사본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쿰란 유적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문서들 가운데 특히 공동체 규율(1QS) 문서는 이 곳에 살았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제 이들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공동체 규율 문서와 쿰란 지역의 모습을 통해 이들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쿰란 유적터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볼 문서는 공동체 규율(1QS, Serek haYahad) 문서이다.
1.
이분법적인 신앙관
공동체 규칙(Rule of Community)은 쿰란 1번동굴을 의미하는 1Q라는 기호와 본 문서의 서두 부분에 나오는 공동체 규율(Serek haYahad סרך היחד)라는 표현 앞의 자음 S를 따서 1Q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훈련교관(משכיל) ... 에게 그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규칙의 책 (두루마리) (1.1)
즉, 이 두루마리는 공동체를 훈련시키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과정과 규칙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무엇이라 규정하는가? 아래를 보라.
정해진 절기들에 관한 모든 계시 규정들을 잘 지키면서 완전하게 살아라. 모든 빛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개개인의 운명을 따라 사랑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개개인의 죄악을 따라 어둠의 자녀들을 미워하라 (1.9-10)
즉, 이들은 자신들을 빛의 아들들이라 규정하고, 자신들의 규율 밖에 있는 이들을 어둠의 아들들이라 규정하며 이분법적인 경계를 만들었다. 이들은 잘못된 예루살렘 성전제의와 신앙이 아니라 “의의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와 규율서를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쿰란 공동체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자신들의 빛의 자녀들이라 여기는 이들은 특별히 태양의 빛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도 태양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등지고 태양이 뜨는 동쪽을 향해 기도를 했는데, 이들의 이러한 관습은 물리적인 성전을 초월한 신앙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공동 식사
에세네파는 하루에 두 번 공동식사를 함께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공동 식사는 에세네파의 정식 회원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며, 그 규율을 어겼을 경우 공동 식사에서 배제된다. 쿰란 유적지에서는 아래와 같은 넓은 식사 장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것은 쿰란 공동체에는 어떠한 회당이나 성전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이 공동 식사 장소에서 공동체의 모임과 가르치는 일 등을 했을 것이다.
3.
정결례 (제의적)
공동체 규율서는 쿰란 공동체에 입문하지 못한 자들을 아래와 같이 비판하면서 정결례에 관한 언급을 한다.
그는 속죄 행위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지 못할 것이요, 정결케 하는 물에 의해서도 정화되지 못할 것이다 (3.4) ..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에 순종할 때, 그의 육체는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림으로 인하여 깨끗게 되며, 회개의 물에 의하여 거룩하게 된다 ... (3.9)
물을 통한 정결례는 레위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흐르는 물이나 돌에 고인 물을 통해 정결하게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쿰란 공동체 내에는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를 통한 속죄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결례를 통한 속죄 예식이 행해졌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또 다른 정결의 방편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을 통한 정결례와 하나님의 말씀 순종이 쿰란 공동체의 신앙 정체성의 중요한 두 축을 이루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