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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고대의 다양한 번역본들

본문비평장치(BHS)에서 사용되는 주요 사본/번역본들의 기호
기호
사본/역본
사마리아 오경
𝔄
아랍어 번역
카이로 게니자
𝔊
70인역
𝔏
라틴어 역본들
𝔐
마소라
𝔔
쿰란(사해사본)
𝔖
시리아역
𝔗
타르굼
𝔙
불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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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역본들의 중요성

지난 시간에 함께 공부했던 사해 사본들이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성서 사본들이라는 점에서 본문비평의 가장 중요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지만, 온전한 사본이 별로 없고, 대부분 파편 내지 사본 일부만 발견되었다는 점이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히브리어로 작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보다 통전적으로 남아 있는 고대 번역본들은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번역본들을 대함에 있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번역은 반역이다.
어떤 언어에서 완전히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옮겨질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원문은 그 문장의 어순이나 단어의 배열과 같은 것들도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의 어순이나 배열이 다른 문법체계를 가진 언어로 옮겨졌을 때, 본래의 문장 구성이 바뀌어질 수밖에 없다(예.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 - 주기도문은 본래 “하늘에 계신”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시작).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과 번역본을 비교하며, 히브리어 어순을 최대한 지키려고 했는지, 아니면 아예 무시했는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원어와 번역어 사이의 1:1 대응이 불가능하다. (등가 번역의 한계)
번역본을 통한 원문 복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어와 원어의 1:1 대응이다. 그러나 각 언어마다 단어의 의미체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 원칙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נשא 동사는 “들어올리다”를 의미하기도 하고, 여성(אישה)이라는 표현과 함께 “혼인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표현의 경우 원어와 번역어의 1:1 대응 원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원어의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과 관용어적인 표현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번역도 일종의 해석이다.
현대에는 문자적인 번역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대 시대의 일부 번역본들은 번역이라기 보다 해석, 내지 주석의 성격을 갖고 있는 번역본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번역본이 해석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대체로 문자주의적인 번역을 고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번역본의 대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번역본이 있다면 당연히 그 번역본의 대본(Vorlage)이 되는 히브리어 원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히브리어 본문이 무엇이었는지 특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해에서 발견된 성서 사본들은 히브리어 성서 본문 전통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번역본들에서 나타나는 이문이 아예 다른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전제하고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자음 히브리어 본문으로 인한 독법의 차이가 번역본에 나타날 수 있다.
본래 히브리어 원문은 자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모음 부호를 붙이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יראו 라는 단어의 어근은 ראה (보다) 혹은 ירא (두려워하다)가 될 수 있다. 즉, 이러한 차이는 번역본이 참조했던 원문이 달랐다기 보다는 동일한 원문에 대해 다른 독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칠십인역 (그리스어역)

칠십인역에 대해서는 본 수업의 첫 시간에 개괄적으로 이미 다룬바 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칠십인역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지만, 이 편지는 그 역사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위경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간접적으로 그리스어역 성서(토라)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존재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의 형성 역사에 비추어보면 이미 꽤 이른 시기에 이 그리스어역 번역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 번역본에 대한 언급은 기원전 117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집회서의 서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정성껏 번역하였지만 어떤 표현들은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고 여겨지니 이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말 표현들을 다른 말로는 똑같이 옮길 수 없습니다. 이 글들뿐 아니라 율법서조차도 그리고 예언서와 나머지 글들도 원문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에우에르게테스 임금 통치 삼십팔년에 저는 이집트에 가 얼마 동안 머물면서, (집회서 머리글 15-25) (링크)
4Q119 (레위기 사본)
4Q121 (민수기 사본)
그러나 또한 안타깝게도 기원전 3-2세기 무렵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칠십인역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신, 이후 칠십인역을 필사했던 후대의 사본들을 통해 그 본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오래된 70인역 사본으로는 쿰란에서 발견된 4QLXXLev-a(레위기; 4Q119)와 4QLXXNum(민수기; 4Q121) 등이 있다.
칠십인역 전통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 책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 된 문헌들 또한 정경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즉, 칠십인역 자체는 히브리성서의 번역본으로 기능했다기 보다는 헬라 문화권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정경의 기능을 했던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칠십인역에 사용된 언어는 코이네-그리스어(Koine-Greek)이다. 이 언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주변을 장악하면서 단행한 지중해 주변의 헬라화를 통해 이 지역 전역으로 전파되어 사용된 그리스어로 이전에 사용되었던 고대 그리스어(Ancient Greek 혹은 Attic Greek(아테네식 그리스어))과 구분된다. 이 언어는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헬라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도 여전히 지중해 세계의 국제 공용어(lingua franca)로써 이후 로마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 초반 때까지도 두루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언어 역시 바로 이 코이네 그리스어이다. 결국, 헬라어 문화권에서 성장한 기독교는 70인역 성서를 신약과 더불어 정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구약성서들이 언제 그리스어로 모두 옮겨졌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기원전 3세기 무렵 오경의 번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서, 예언서, 그리고 가장 늦게 정경화된 성문서 순으로 번역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번역은 기원후 2세기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리스어 번역본들은 한 종류의 번역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번역이 발견되기도 한다(e.g. 사사기, 에스더). 이러한 특징들로 미루어 보아 70인역은 다양한 번역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학자들은 70인역이 대체로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정도까지 번역되었던 흔적을 통해 히브리어 성서가 마무리되는 시점과 칠십인역의 번역이 시작되었던 시점이 겹쳐졌을 것이라 보고 있다. 즉, 히브리어 성서의 각 본문전통들이 어느 정도 확정되고 난 이후에 바로 번역이 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서 자체가 어느 정도 개정되고 보완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에 칠십인역 역시 이전과는 다른 버전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판본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티칸 사본 사무엘상 17-18장 부분
사무엘상 17-18장의 마소라와 칠십인역의 본문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코덱스(A)의 경우 마소라 본문을 따르지만 바티칸코텍스(B)는 39절 정도가 더 짧은 본문을 포함하고 있다(삼상 17:12-31,41,48b,50,55-58,18:1-6a,10-11,12b,17-19,21b,29b-30 누락). 이러한 누락은 보다 오래된 히브리어 본문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누락된 구절들은 대체로 해석적인 추가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70인역 사본들은 마소라 본문과도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칠십연역 사본들 사이에서도 본문 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선 강의에서도 언급했듯이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 전통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본들이 파편이지만 쿰란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바가 있다. 이를 통해 70인역의 히브리어 대본의 고대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주요한 그리스어 성서 사본들 목록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기 파피루스 사본들
피셔의 책에서 주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초기 본문 증거들은 아래와 같다.
957번 - 파피루스 라일랜즈 그릭 458 (언셜체 - 대문자의 둥근 형태) (신명기 23-28장) 기원전 2세기경
847, 848, 942번 - 파피루스 푸아드 266 (신명기 10-11, 32-33 일부) 기원전 2-1세기경
961-967, 2149-2151번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창세기, 민수기, 신명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에스더, 집회서 단편) - 특히 다니엘, 에스겔의 경우 오래된 책의 형태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짐. 기원후 4세기.
히브리어 사본 목록(참고)과 비교해 보면 그리스어 성서 사본의 흔적이 시대적인 공백기간 없이 매우 꾸준하게 생산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유대교에 있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향과, 4세기 이래 비잔틴시대와 중세 시대를 걸쳐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 전통이 그리스어 성서를 주된 정경의 본문으로 채택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파피루스 푸아드의 경우 본문 표기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는 특이한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파피루스는 하나님의 이름 신성사문자를 히브리어 알파벳 יהוה로 기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번역본은 신성사문자의 자리에 ΚΥΡΙΟΣ (κύριος, 큐리오스, “주님”)를 넣는다. 어떤 학자들은 신성사문자의 자리 양 옆에 간격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애초에 이 자리를 비워 두었고(6개의 알파벳 ΚΥΡΙΟΣ), 후에 다른 누군가가 히브리어 알파벳을 채워 넣은 것이라 보고 있다. 아무튼 이는 히브리식 개정의 흔적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4Q120(4QLXXLev-b) 사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Ιαω (야오, 혹은 야호)라고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했는가 하는 흔적이 된다. 그러나 이후 신성사문자는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일괄적으로 ΚΥΡΙΟΣ로 표기된다.
유대 개정본
개정본: 칠십인역과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고, 히브리어 원본에 더 충실한 방향으로 번역이 수정된 버전
카이게 개정본 (kaige revision)
카이게 개정본은 히브리어 본문의 구문에 최대한 맞추려는 과정에서 히브리어 גַם (감)혹은 וְגַם (붸감) 구문을 그리스어 “카이 게”(και γε; 그리고 진실로)로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의 사본은 그리스시대 말기에서 로마시대 초기(기원전 1세기~1세기)에 나타난다.
(*요엘 2:29[3:2])
나할 헤베르에서 발견된 카이게 사본인 8HevXII (12소예언서). 하나님의 이름이 고대 히브리어로 적혀 있음.
본래 이러한 카이게 개정은 테오도치온이 개정한 것으로 여겨졌는데(기원후 190년경), 이미 신약성서의 구약 인용 부분에서 카이게 개정본의 흔적이 드러남에 따라 학자들은 테오도치온 이전이 카이게 사본이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은 위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해결되었다. 위 사본은 카이게 개정본과 테오도치온 개정본의 특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사본이기 때문이다. 이 사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성사문자를 번역하지 않고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표기
*인명이나 지명은 원칠십인역 본문 전승의 음역을 받아들임
*당시 형성되고 있었던 마소라 본문 전통을 따르는 경향
아퀼라 (α’ 기원후 130년경)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는 당시 새로운 그리스어 성서 역본인 아퀼라역을 번역하였다. 그는 랍비 아키바의 제자였고, 아키바의 문서 이해를 따랐다고 볼 수 있는데 히브리어 성서의 모든 단어와 철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의 번역은 상당히 원어 중심의 문자적인 번역이었다. 그는 최대한 원어와 번역어의 1:1 대응 원칙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기계적인 대응이 그리스어 의미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번역 동기는 당시 기독교의 전유물이 되었던 70인역 번역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한 의도로 생각된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메시아’의 번역인데 그는 이 단어를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가 아니라 이와 유사한 의미의 단어인 ηλειμμενος(엘레임메노스)를 사용했다.
심마쿠스 (σ’ 170년경)
심마쿠스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Epiphanius, De Mensuris et penderibus, 16). 그는 랍비 메이르의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번역본은 170년 경 만들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아퀼라 번역본을 근거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여 사본의 문체를 개선하였다. 즉, 원문과 번역어의 등가 원칙을 지키면서 보다 미려한 표현의 번역을 시도했다. 훗날 히에로니무스는 심마쿠스의 번역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번역은 헥사플라 단편과 다른 문헌의 인용문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테오도치온(θ’ 190년경)
테오도치온은 앞서 언급한 카이게 개정본을 기초로하여 이 성서 번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본을 개정했는지 파악하기에는 그 자료가 충분치 않다. 테오도치온 역시 소아시아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였고, 콤모두스 황제 시대에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역시 앞선 개정 번역자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 단어 어근을 기초로하여 번역했고, 등가 번역 원칙을 따르려 했다. 그리고 적절한 대응어가 없다면 음역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는 아퀼라와 심마쿠스 사이쯤되는 번역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번역은 오리게네스가 특별히 중요시한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대 개정본들의 흔적은 칠십인역 성서가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된 이후에도 일부 랍비 전통들을 통해 보존되었으며, 개종자들에 의해 번역된 그리스어 성서 개정본들을 지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역본들은 기본적으로 마소라 본문의 문자적인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데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칠십인역 그 자체는 유대인들과 더욱더 그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230~240년경)
오리겐의 헥사플라는 히브리어 본문과 당시 존재했던 그리스어 번역 성경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는데(히브리어 본문 / 그리스어 음역 / 아퀼라 / 심마쿠스 / 70인역 개정? / 테오도시온), 이는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그리스어역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참고자료). 이는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그리스어역 성서에 대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이후 네 개의 번역만을 담은 “테트라플라”라는 작품도 완성하였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편집본 (시25:6-7)
그리고 오리겐은 히브리어 성서와 차이가 나는 번역본 부분에 특정하게 표시를 함으로 나름대로 본문비평장치 체계를 마련하였다.
70인역에는 있지만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없는 구문 표시
÷ εἰς φαῦσιν τῆς γῆς ✓ (땅의 광명, 창세기 1:14)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지만 70인역 본문에는 없는 구문을 다른 번역본에서 가져왔음을 아래와 같이 표시
그러나 문제는 오리겐이 위와 같은 본문비평장치를 완벽하게 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어 본문들을 비교하고 개정함으로 70인역 본문을 되도록이면 히브리어 본문에 가깝게 만들었다. 즉, 오리겐의 70인역 본문은 70인역 원본이라기 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어 본문의 번역본에 가깝게 만든 개정본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오리겐의 헥사플라는 총 6500여 페이지에 달했기 때문에 이 책의 완전한 복사본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고, 주로 70인역 부분을 필사했는데, 그나마 오리겐이 표시했던 본문비평장치를 빼먹고 필사했던 까닭에 본래 그가 가지고 있었던 70인역의 형태를 복원하기는 매우 힘들게 되었다. 즉, 그의 사본을 통해 전승되는 칠십인역 본문은 본래의 칠십인역이 아니라 그의 개정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텔라의 주교 바울이 기원후 617년경에 만든 시리아어 헥사플라(Syh)가 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칠십인역 본문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였는데, 그는 오리겐의 아리스타르크 기호도 자신의 번역본에 보존하였다.
이 헥사플라는 가이사랴에 비치되어 있었지만, 7세기 무슬림이 이 도시를 함락할 때 소실되었다. 그런데 이 헥사플라의 일부가 복사된 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헥사플라를 복원하는 가운데 있다. 첫 헥사플라 편집본은 Frederick Field (1875)가 출간한 바 있다(링크).
참고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재활용 문서. 윗부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그리스어)가 헥사플라의 흔적이다.
루키안 개정본 (안티오키아 본문)
기원후 4세기의 또 하나의 개정본이 있는데 이 본문은 기독교 개정본이다. 이 본문은 기원후 312년에 순교한 안디옥의 장로 루키안과 관련이 있고, 이 때문에 루키안 개정본이라 불린다. 이 개정본 또한 히브리어 본문에 따라 개정되었던 것인지 논쟁 가운데 있다. 이 개정본은 예배에서의 낭독을 위해 시편의 그리스어 문체가 개선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헥사플라를 사용하였으며, 심마쿠스를 중요시했다. 학자들은 이 본문이 카이게 본문이나 헥사플라보다도 더 본래적인 칠십인역을 참고했을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런 차원에서 루키안 개정본이 아닌 그보다 더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안티오키아 본문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주교 헤시키우스(300년 경)가 개정한 본문에 대한 증거가 히에로니무스에 의해(역대기 서문) 언급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전해지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히브리어 성서의 그리스어역 본문의 역사는 다음의 단계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히브리어 성서에 대한 최초의 헬라어 번역 (70인역)
2) 최초 헬라어 역본에 대한 초기 개정역들 (카이게-테오도치온, 안티오키아)
3) 아퀼라, 심마쿠스, 테오도치온의 개정
4) 오리겐의 개정 (칠십인역, 5칼럼)
5) 루키안의 개정 (헤시키우스 개정?)
코덱스
고대 후반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문자로 된 필사본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리스어 철자들은 대개 이어쓰기 방식이 사용되었고, 관습적인 표현들은 줄여쓰기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문자를 약간 둥글게 만든 서체를 언셜체(uncial script)라고 하는데, 이 언셜체로 쓰인 대표적인 사본이 바티칸 코덱스 사본이다(위 이미지 참고). 줄여쓰기는 윗부분에 줄을 그어 표시를 해 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κς 퀴리오스(주님, 하나님) χς 크리스토스(그리스도) ισλ 이스라엘 ανος 아노스(사람) (*그리스어 위에 윗줄이 부가되어야 함)
대문자는 9세기까지 주로 사용되다가 이어서 흘림체로 발전하여 소문자로 대체되었다. 소문자는 더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소문자 본문을 활용하게 되면서 대문자로는 표기하지 못했던 띄워쓰기, 강세, 마침표 등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대체로 소문자 서체 사본은 9세기 이후의 후대 사본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름
연대
특징
기호
4세기
일부 본문히 훼손되기는 했지만 거의 완전한 필사본으로 남아 있음.
B
4세기
후대의 교정본에 영향을 받음. 바티칸 사본과 많은 부분 일치. (3명이 필사)
S
5세기
4권으로 구성. 본문의 통일성이 결여. 오경 중 레위기만 바티칸 코덱스와 유사. 사무엘상/사무엘하는 헥사플라의 영향. 예레미야는 개정 이전의 본문
A
에프래미 시리 재록 코덱스
5세기
시가서 단편들이 있는 양피지 재록필사본
C
베네치아
8세기
두 부분(바티칸과 베네치아)으로 나뉘어짐. 두 부분 사이에서 시편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
V
비평적 편집본
궤팅겐 칠십인역 (1926년부터)
알프레드 랄프스 (1935년)
독일어 칠십인역 (2000년)
영어 칠십인역 (2007년)

3. 타르굼 (아람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셈어에 속하는 언어로 히브리어와 매우 유사하며, 마소라 본문에서도 아람어로 된 일부 본문들(에스라, 다니엘)이 남아 있다. 1차 성전 파괴(기원전 587년) 이후, 유대인들은 당시의 국제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예수님 시대 당시까지도 아람어는 이스라엘에서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되었다. 물론, 히브리어는 거룩한 언어로 계속해서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당시 많은 이들은 이를 원활하게 읽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러한 아람어 번역본들을 타르굼(תרגום “번역된”)이라 부른다.
타르굼 번역이 어떤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처음 번역된 타르굼은 기원전 4-3세기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의 그리스어 번역(오경)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와 멀지 않다. 아람어 타르굼은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번역이 아니며 매우 신앙적인 방식의 해석을 자유롭게 부가한 미드라쉬적인 본문이다. 타르굼에서는 다른 말로 바뀌어 사용되거나 당시의 종교적인 견해가 함축되어 있다.
쿰란
쿰란에서 발견된 레위기 타르굼(4QtgLev = 4Q156)은 기원전 10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단편들은 레위기 16:12-15와 16:18-21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비교적 문자적인 번역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소프 파숙( : )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표기는 카이로 게니자의 성서 필사본과 타르굼 필사본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이는 성서 낭독시 구두로 전승되었던 구두점의 흔적을 나타내는 듯 하다. 즉, 구두점의 단위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다.
또 다른 쿰란의 타르굼으로는 11번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11QtgJob)이 있다. 이 두루마리는 욥기 17:14-42:12의 본문을 단편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이 필사본은 기원후 1세기 중반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본래 본문은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필사본 또한 전반적으로 문자적인 번역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4번 동굴에서 욥기 타르굼의 또 다른 두 단편(4QtgJob = 4Q157)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욥기 3:5-9와 욥기 4:16-5:4의 일부 본문이 포함되어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이러한 특징들로 미루어볼 때 초기 아람어 번역들은 대체로 문자적인 번역을 지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팔레스타인 타르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승된 팔레스타인 타르굼은 다양한 본문 전통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타르굼의 특징은 본문을 비교적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본문을 풀어서 다시 설명하기도 하고, 미드라쉬적으로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오경의 팔레스타인 타르굼 사본은 1506년에 필사된 “네오피티 코덱스"(Codex Neofiti)이다. 이 본문 전통은 대부분 1, 2세기나 그 이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팔레스타인 타르굼 전통을 보여주는 다른 사본은 단편 타르굼(Fragment-Targum, 제2예루살렘 타르굼)이 있다. 이 사본은 완전한 타르굼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여러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의 특징은 그 본문의 다양성이며, 카이로 게니자에서 팔레스타인 타르굼의 다양한 본문 형태들이 발견되었다.
바벨론 타르굼(타르굼 옹켈로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타르굼은 타르굼 옹켈로스이다(Targum Onkelos). 이 사본이 바벨론 타르굼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바벨론식 모음부호가 부가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바벨론에서 전승되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바벨론 타르굼은 기원후 3세기나 5세기 무렵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세 초기에 유대교 전통 내에서는 팔레스타인 타르굼보다 바벨론 타르굼의 권위가 더 크게 인정받았다.
옹켈로스라는 이름은 아퀼라의 바벨론식 표현인데 당시 유대교 내에서 널리 인정받았던 아퀼라 사본의 이름과 관련되었거나, 아퀼라가 직접 관여한 것이라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바벨론식 모음 부호
바벨론 타르굼은 대체로 마소라 본문을 따르면서 문자적으로 직역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만큼이나 자유롭고 광범위한 미드라쉬적 해석은 나타나지 않지만, 때로 문자적인 번역과 해석이 한데 섞여 있기 때문에 본래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 외에도 타르굼 요나탄(Targum Jonatha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예언서에 대한 타르굼이 있다. 여기서 요나탄의 이름은 힐렐의 제자였던 요나탄 벤 웃지엘의 이름이라 여겨지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위-요나탄 타르굼 (Targum Pseudo-Jonathan, 제1예루살렘 타르굼)
요나탄 타르굼이라는 이름은 이 책의 명칭에 표기된 약어 ת׳׳י (실제 타르굼 예루샬라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런 오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pseudo라는 이름이 부가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매우 방대한 오경 타르굼인데 문자적인 번역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방대한 해석이 부가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그 저작 시대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4. 페쉬타 (시리아역)

시리아어는 동부 아람어 방언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 아람어에서 파생된 언어이다. 시리아어 알파벳은 처음 아람어 알파벳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점차 고유한 흘림체 글꼴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페쉬타는 ‘널리 퍼진’ 번역을 의미한다.
페쉬타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 번역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일부 칠십인역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어 흘림체 알파벳
페쉬타는 티그리스강 동편의 아디아베네 왕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왕국의 왕족은 기원후 1세기에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왕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트라야누스에 의해 정복되어 앗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1세기 중반에 이 페쉬타가 번역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이는 다분히 가설적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페쉬타가 기원후 150년 무렵 에뎃사 지역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성되었을 것이라 추론하기도 한다.
이 유대 공동체는 몇십 년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이 번역본은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성경이 되었다. 즉, 유대 공동체에서 시작된 번역본은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전승되었던 것이다.
오경의 페쉬타 번역은 한편으로는 마소라 본문을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타르굼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소라 본문 - 출3:12 “너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페쉬타, 옹켈로스 - 출3:12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섬겨야 한다”
이 외에도 칠십인역과의 공통성 역시 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학자들은 페쉬타를 번역할 때, 히브리어 본문, 칠십인역, 그리고 타르굼 전통들을 참고하여 번역에 적용했을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

5. 베투스 라티나와 불가타 (라틴어역)

라틴어 성경 번역본은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 고대 라틴어역)와 불가타(Vulgata)로 구분된다. 베투스 라티나는 칠십인역에서 번역되었고, 불가타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되었다. 불가타 명칭은 16세기부터 사용되었은데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것의 의미를 갖고 있다.
불가타 (히에로니무스, 340?~420)
달마티아에서 출생했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한동안 시리아에서 수도사로 활동했고 유대계 기독교인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382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교황 다마수스 1세(Damasus I)가 맡긴 라틴어 성경 번역본의 교정을 맡게 된다. 당시 다양한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혼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교황 다마수스 1세의 사후, 그는 386년에 이스라엘로 떠나 자신의 동료인 파울라(Paula)와 함께 베들레헴에 수도원과 학교를 세우고 420년 사망할 때까지 그 곳에서 활동하는데, 그는 새로운 라틴어 성경 번역본 불가타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예수님 탄생 교회 지하의 히에로니무스 기념 예배당)
히브리어 본문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했던 이러한 작업은 그 때까지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칠십인역과 이에 기반을 둔 고대 라틴어 번역본을 베재하려는 시도록 읽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오직 히브리어 본문 만이 진실된 성서의 내용을 전승하는 것이라 여겼다.
아미아티누스 코덱스(Codex Amiatinus) - 이 불가타 필사본은 690-71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수도원은 교황에게 선물하기 위한 선물로 라틴어 성서를 필사했는데 다른 라틴어 번역본이 아니라 불가타 본문을 필사대본으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불가타 역이 거의 유일하게 통일성 있게 번역된 라틴어 성서였기 때문이다.
고대 라틴어 단편들
이 라틴어 단편들은 칠십인역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에 본래 칠십인역에 대한 단서로 여겨지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본래적인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에 중요한 본문비평의 자료로 다루어진다.

6.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대 제사장과 아비샤(Abisha) 두루마리, 1905
옛 사마리아 성소
사마리아 오경은 그리심산을 중요한 성소로 삼고 그 곳에 거주해 오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이 보존해 온 성경으로 오경 부분만 포함하고 있다. 에스라 4:11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은 페르시아 시대 때 유다인들과 결별하여 각자 다른 종교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의 사본은 히브리어로 적혀 있는데, 알파벳 체계는 사마리아 전통의 알파벳읠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본은 아비샤(Abisha) 두루마리로 아론의 증손자이자, 비느하스의 아들인 아비수아(역대상 6:4,35)가 손수 필사한 사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사본들은 12~13세기의 중세 사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인들과 결별하게 된 것은 기원전 128년경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했던 때이다. 따라서 추정하기로 사마리아 오경인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본 사마리아 오경에는 특히 자신들의 성소인 그리심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오경, 출애굽기의 십계명 본문(출20:17)에는 다음을 추가하고 있다.
And when it so happens that LORD God brings you to the land of Canaan, which you are coming to possess, you shall set up there for you great stones and plaster them with plaster and you write on the stones all words of this law. And it becomes for you that across the Jordan you shall raise these stones, which I command you today, in mountain Gerizim. And you build there the altar to the LORD God of you. Altar of stones. Not you shall wave on them iron. With whole stones you shall build the altar to LORD God of you. And you bring on it ascend offerings to LORD God of you, and you sacrifice peace offerings, and you eat there and you rejoice before the face of the LORD God of you. The mountain this is across the Jordan behind the way of the rising of the sun, in the land of Canaan who is dwelling in the desert before the Galgal, beside Alvin-Mara, before Sechem.
주 하나님께서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실 때에 너희는 그곳에 큰 돌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르고 그 돌 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여 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너희가 들어 올려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곳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라. 돌로 만든 제단. 그 위에 쇠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돌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물을 올려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음식을 먹으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이 산은 요단강 건너편 해 돋는 길 뒤편, 갈갈 앞 광야, 알빈 마라 옆, 세겜 앞 가나안 땅에 있는 산입니다.
물론 위와 같은 부분은 사마리아 전통에 따라 추가된 부분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이 외에도 종파적 이해와 관계 없는 마소라 본문과 다른 이본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들 가운데 아래의 사본들이 사마리아 오경의 본래 대본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4QpalaeoEx-m (4Q22) (기원전 1세기 경) - 출애굽기 6:25-37:16 내에 속한 43개의 칼럼. 사마리아 오경의 확장 본문을 담고 있는데(출7:18b,29b[8:4b]; 8:19b[23b]; 9:5b,19b 하나님의 명령을 보다 자세히 서술함으로 문학적으로 보완), 다만 사마리아 오경에서 종파적으로 추가된 열번째 계명(20:17)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음.
4QNum-b (4Q27) (기원전 1세기 말) - 민수기 11:31-36:13 내에 속한 27개의 컬럼. 단락 표시가 붉은색 잉크로 구분. 당시 낭독을 위한 단락구분으로 여겨짐. 특이하게도 사마리아 오경, 마소라, 칠십인역과 유사한 본문들을 모두 포함. 그러나 절반 정도가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 전통을 보여주고 있음(민20:13b; 21:12a,13a; 27:23b).
이로 미루어볼 때 사마리아 오경은 유대인들과의 갈등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성서 전통을 발전시키기 위해 칠십인역이나 마소라 본문 전통과는 다른 본문 전통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종파적인 이해를 부가시킨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