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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1장에서 시작된 창조 이야기는 2:4 전반절에서 끝맺는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 세계의 창조는 1장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2장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의 제정(창조)”을 행하신다. 1장에 언급된 창조가 “물질 세계의 창조”를 서술하고 있다면 “안식일의 제정”은 인간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신학적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집착하는 자들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부정하시는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제정에 내재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안식일의 제정을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2:3은 아래와 같다.
וַיְבָרֶךְ אֱלֹהִים אֶת־יוֹם הַשְּׁבִיעִי וַיְקַדֵּשׁ אֹתוֹ כִּי בוֹ שָׁבַת מִכָּל־מְלַאכְתּוֹ אֲשֶׁר־בָּרָא אֱלֹהִים לַעֲשׂוֹת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지으시는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카다쉬(קדש) 동사는 “거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거룩함”은 “구별됨”의 의미와 연결된다.* 필자는 앞선 글에서 창조 과정 가운데 “구별됨”의 특별한 의미를 논한 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안식일의 제정 역시 하나님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과 별 등과 같은 천체를 통해 이미 “물리적 시간”을 구별하셨다. 그런데 안식일의 구별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단순히 구별된(בדל) 시간이 아니라 거룩하게 구별된 시간(קדש)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날이다.
물리적으로 구별된 시간은 천체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천체를 운행하시며 시간을 구분하셨고, 인간은 그것을 관찰하며 시간을 구분했다. 하루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되며, 월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계절은 태양과 지구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구분되고 1년은 4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에 따라 구분된다.
그러나 안식일은 위와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발견되는 “물리적 시간의 기준”으로 규정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안식일을 기준으로 나뉘는 1주일의 개념은 고대 문헌 가운데 성서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고대 근동의 달력과 축제 기록을 보면, 7일 단위의 개념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적어도 매주 안식한다는 개념은 성서에서 유일하다. 사람을 종으로 인식하는 고대 근동 개념에서는 노동을 쉬는 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숨쉴 틈도 없이 사람들은 1년 내내 그들이 섬기는 상위 계급의 사람들을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성서에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모든 이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 것이다! 고된 심신을 달래고, 하나님만 온전히 묵상하며,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깨닫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셈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내용은 만나 이야기에서 또한 분명하게 드러난다(출16장).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매일 공급해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으시고, 그 전날 이틀 치에 해당하는 만나를 거두라고 말씀하셨다(출16:23).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온전히 안식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식일에 나와 만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집트에서 오랜 시간 노예 생활 하던 습관이 있어 쉬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가 노예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는 이들을 벌하시기 위한 진노가 아니라, 여전히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진노로 읽혀진다.
안식일은 결국 우리를 법에 얽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셈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이 안식일마저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됨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힐난한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법 자체에 관심이 있지, 그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라를 두 마디로 요약하셨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39)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식일의 법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종된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안식일의 목적보다, 겉모습에만 집착했고,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란듯이 안식일에 사랑을 베푸셨고, 이를 통해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화석화된 안식일(토요일)을 성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일요일)을 지키며 새롭게 율법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식일(주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표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 우리를 지으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 뜻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하 23:13 ויבדל אהרן להקדישו “아론은 구별되어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의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별하다(בדל)와 거룩하다(קדש)의 의미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 앞선 글 “ברא 동사에 내재된 의미”, “구별함 그 거룩한 창조 행위” 참조.
** 앞선 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