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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쿰란 공동체와 성서, 그리고 기독교

본 강의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우리는 쿰란 공동체가 남겨 놓은 가장 중요한 유산인 성서 기록들이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는 성서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의 접점의 가능성이 있는지, 혹은 그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쿰란 공동체의 문서들이 밝혀 주는 성서의 역사

쿰란 공동체와 성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성서 두루마리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대개 이 성서가 어떻게 지금 우리의 손에 전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세상에 과연 “성서의 원본"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마치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을까와 같은 질문이다. 즉, 이러한 질문의 답은 신앙의 신비로 남겨진 답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 답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한글 번역 성경은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4판 히브리어 성경 편집본을 주 번역대본으로 삼고 있다. 이 히브리어 성경은 앞에서 언급한 표현대로 “편집본"(edition)이다. 이는 이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의 단일한 본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본들을 참고하여 편집된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BHS가 처음 발간된 출판연도는 1977년도이니, 이전에 번역된 성경들은 그 이전의 히브리어 편집 대본에 근거하여 번역했던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히브리어 성경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1.1. 한글 구약 성경

구약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무엇일까? 아니, 먼저 우리가 현재 번역된 구약성서의 대본으로 삼고 있는 히브리어 성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많은 교회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의 성경번역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이 내용과 실제 초기 한글 번역본들은 대한성서공회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된 구약성경에서 출발하여 그 대본이 되는 히브리어 본문을 역으로 추적해 나가면서 본문비평의 개념과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던 초창기 한글 성경은 원어 성경에서 직역되지 못했고, 한문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 상당부분 의존하여 번역되었다. 기본적으로 원어성경에 기반하여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1938년에 출간된 「셩경 개역」이다. 성서공회 웹페이지에 따르면 셩경 개역은 이후 한글 표현 방식을 개선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표제지 연도 1956)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성경 번역이 사용한 원문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번역과 개정 과정에 사용된 중요한 원문 성경과 역본으로는, 1881년 옥스퍼드에서 간행된 팔머의 「그리스어 신약」(E. Palmer, The Greek Testament with the Readings Adopted by the Revisers of the Authorised Version, 1881)과 1923년판(12판) 네슬레의 「그리스어 신약」(Eberhard Nestle,?Novum Testamentum Graece, 1923)과 긴즈버그의 「히브리어 구약」(Ginsburg, Torah, Nevi’im, Ketuvim: new critical edition,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1908-1926, Introduction to the Masoretic Critical Edition of Hebrew Bible, 1897)과, 「영어 개역」(English Revised Version, 1881-1885), 「영어 개역관주 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with Reference)과 「미국 표준역」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과 「흠정역」(King James Version, 1611)과 「한문 대표자역 문리 성경」과 「개역 일본어 신약전서」들이며, 이 밖에도 라틴어 독일어 불어 일본어 등의 번역 성경들이 참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2. 히브리어 성서

긴스버그 히브리어 본문
긴스버그
즉,개역판 한글 번역본은 1908-1926에 만들어진 긴스버그 히브리어 구약 본문(1판은 1894년에 출간)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긴스버그가 편찬했던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마소라 편집본”인데(소개), 1525년에 이미 출간되었던 Jacob ben Hayyim ibn Adonijah 가 편집한 랍비 성경 본문(Rabbinical Bible)인 Bomberg Edition(마소라 편집본)에 기초한 마소라 편집본(마소라에 대해서는 후에 논의할 예정)이다. 긴스버그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었지만, 15세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는 Jacob ben Hayyim ibn Adonijah가 편집한 랍비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 소개하는 책을 저술하였고, 구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에 히브리성경 마소라 편집본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마소라 편집본이란 특정 히브리어 사본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이를 대부분 받아들이되, 필사상의 오류나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부분들을 표시하고 다른 사본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작업을 진행한 성서 본문을 의미한다. 단, 하나의 사본이 아니고, 여러 개의 사본들을 비교하여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편집본(edition)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긴스버그의 히브리어 성경 편집본의 기초가 되었던 16세기에 출간된 랍비 성경 본문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참고
Christian D. Ginsburg, Introduction to the Massoretico-Critical Edition (바로가기)
Ginsburg의 히브리어 성서 편집본 (바로가기)
랍비 성경 본문 (Rabbinical Bible)
랍비 성경은 히브리어로 미크라옷 그돌롯(מקראות גדולות Great Scriptures)이라 불린다(온라인 성경). 이 랍비 성경은 크게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 본문, 아람어(타르굼) 번역, 그리고 랍비들의 주석들로 구성되어있다(참고). 그가 정확히 어떤 성서 사본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벤 아셰르(Ben Asher)의 히브리어 사본 형식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론 벤 아셰르는 누구이며, 그가 갖고 있었던 히브리어 본문은 무엇일까?
*참고
Miqraot Gedolot (Bomberg Edition) (바로가기)
Jocob Ben Chaim Ibn Adonijah’s Introduction to the Rabbinic Bible (바로가기)
아셰르 가문(Aaron ben Moses ben Asher)의 히브리어 성경 본문
알렙포 코덱스
BHS 편집본에 나타나 있는 마소라 본문
벤 아셰르는(?~960) 가장 정확한 마소라 본문을 작성한 이라고 평가 받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소라 본문이 무엇인지 개략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출판 기술이 발달되기 전, 모든 문서는 손으로 직접 필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필사 과정 가운데 실수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실수 없이 전달되어야 했기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를 부가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소라 기호이다. 마소라 기호는 점과 선,그리고 히브리어 문자 등을 통해 본문이 잘못 필사되지 않도록 한 특별한 장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알아볼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는 이러한 마소라 기호를 부가하는 방식이 여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마소라 표기 방식을 전해준 이가 바로 모세 벤 아셰르와 그의 아들 아론 벤 아셰르이다. 모세 벤 아셰르는 카이로 코덱스(예언서; 895)를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아들 아론 벤 아셰르는 티베리아에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시리아의 알렙포 회당에서 발견된 그 유명한 알렙포 코덱스(920)에 모음부호와 마소라 기호를 부가하였다(*자음은 Shlomo ben Buya가 필사).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알렙포 사본은 알렙포에서 발생했던 유대인들의 소요 가운데 오경 부분이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그리고 아셰르 가문이 전수한 마소라 기호 체계가 적용된 또 다른 성경 사본은 레닌그라드사본(1009) (본문)이다. 이 사본의 표제 정보에 따르면, 카이로에서 만들어졌는데 아론 벤 아셰르의 사본을 따라 필사된 것이다. 이 사본은 구약의 모든 성경들이 온전하게 한 책으로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히브리성서 편집본(BHK, BHS, BHQ)의 주 자료가 되었으며, 알렙포 사본의 소실된 부분을 복원하는데 레닌그라드 사본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마소라 사본 이전의 히브리어 성경 사본
그렇다면 그 이전의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우리가 갖고 있는 온전한 책(codex)의 형태로 된 더 오래된 히브리어 사본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형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책으로 묶여진 형태를 통해 “정경”으로 권위를 갖는 책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기독교의(가톨릭은 좀 다르지만) 구약 정경 범위는 알렙포 사본과 레닌그라드 코덱스에 근거한다.
물론 마소라 사본 이전의 히브리어 성경 본문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대표적으로 쿰란과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사본들), 책(codex)의 형태가 아니라 두루마리(scroll)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정경의 범위를 확정할 수 없으며, 또 많은 경우 파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단지 더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해당 사본의 권위를 마소라 사본보다 우선시 할수는 없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때가 주전 3-2세기(다니엘서 기준)로 추정되는데, 이 때와 9-11세기 사본들의 연대가 자그마치 1000년에 이른다. 이 시기는 히브리어 성서의 전승 역사에 있어 매우 캄캄한 암흑의 세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이 사이를 메꾸어 줄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어 번역 성경인 70인역 성경이다.

1.3. 그리스어 성서 (70인역과 다양한 그리스어 번역본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 to Philokrates)
그리스어 번역 성경이 70인역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바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의 내용 때문이다. 이 편지는 기원전 3-2세기 사이에 저작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편지를 위서(Pseudepigrapha)로 분류한다. 본 문서는 알렉산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던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281-246 BC 재위)의 신료 아리스테아스가 그리스의 정치인이었던 필로크라테스(Philokratés)에게 보낸 편지글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 율법(성서)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이 글은 헬라어 성서 번역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작성되었을 것이다).
본 문서에 따르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인이자 도서관장이었던 Demetrios of Phaleron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히브리 법전을 도서관에 비치해 둘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프톨레미 2세는 막대한 선물을 예루살렘 성전에 보내면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제사장은 각 지파별로 6명의 번역가를 선발하였고, 72명의 번역가들이 72일 동안 성서 번역을 마쳤다.
70인역 사본들
물론, 위서로 평가되는 위 편지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70인역은 이르게는 기원전 2세기부터 존재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히브리어 성서 가운데 마지막으로 작성된 책이라 여겨지는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와 아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는 성서 전체의 정경화가 완성된 때는 아니다. 아무튼 70인역과 관계된 코덱스 사본들의 연대가 히브리어 사본들보다 앞서기 때문에 성서 전승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완본으로 남아있는 그리스어 사본들은 아래와 같다.
4세기 - Codex Vaticanus (B), Codex Sinaiticus (א)
5세기 - Codex Alexandrinus (A)
흥미로운 점은 70인역의 정경 범위와 마소라 본문의 정경 범위가 다르다는 점이다(참고. 정경의 범위 비교). 70인역은 마카비서 등과 같은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성서 본문 상에서도 상당 부분 마소라 본문과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70인역의 대본이 되었던 히브리어 성서 본문이 마소라 본문과는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70인역의 번역가들이 임의로 본문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사해 사본의 발견을 통해 각기 다른 형태의 히브리어 사본들이 존재했음이 일부 증명되기도 하였다.
70인역 사본은 히브리어 마소라 사본보다 그 연대가 수백년이나 앞서 있기 때문에 이 번역본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70인역 성경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 언어에 있다. 그리스어 사본을 통해 히브리어 원문을 정확히 유추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그 권위를 더 높게 두는 것은 방법론상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70인역은 히브리어 원문을 찾아가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70인역은 유대인들에 의해 번역되기는 했지만, 후에 헬라화된 기독교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유대인들이 외면을 받았다. 동일한 구약/히브리 성경을 공유하면서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성서 본문 전승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개신교 전통에서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번역 대본으로 삼고, 또한 정경의 범위를 이와 동일하게 삼고 있지만 성서의 배열과 분류 방식에 있어서 대체로 그리스어 성경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구교 전통에서는 70인역을 통해 전승된 외경 또한 자신들의 성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1.4.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대 제사장과 아비샤(Abisha) 두루마리, 1905
사마리아 오경은 그리심산을 중요한 성소로 삼고 그 곳에 거주해 오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이 보존해 온 성경으로 오경 부분만 포함하고 있다. 에스라 4:11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은 페르시아 시대 때 유다인들과 결별하여 각자 다른 종교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의 사본은 히브리어로 적혀 있는데, 알파벳 체계는 사마리아 전통의 알파벳읠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본은 아비샤(Abisha) 두루마리로 아론의 증손자이자, 비느하스의 아들인 아비수아(역대상 6:4,35)가 손수 필사한 사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사본들은 12~13세기의 중세 사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인들과 결별하게 된 것은 기원전 128년경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했던 때이다. 따라서 추정하기로 사마리아 오경인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본 사마리아 오경에는 특히 자신들의 성소인 그리심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오경, 출애굽기의 십계명 본문(출20:17)에는 다음을 추가하고 있다.
And when it so happens that LORD God brings you to the land of Canaan, which you are coming to possess, you shall set up there for you great stones and plaster them with plaster and you write on the stones all words of this law. And it becomes for you that across the Jordan you shall raise these stones, which I command you today, in mountain Gerizim. And you build there the altar to the LORD God of you. Altar of stones. Not you shall wave on them iron. With whole stones you shall build the altar to LORD God of you. And you bring on it ascend offerings to LORD God of you, and you sacrifice peace offerings, and you eat there and you rejoice before the face of the LORD God of you. The mountain this is across the Jordan behind the way of the rising of the sun, in the land of Canaan who is dwelling in the desert before the Galgal, beside Alvin-Mara, before Sechem.
물론 위와 같은 부분은 사마리아 전통에 따라 추가된 부분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이 외에도 종파적 이해와 관계 없는 마소라 본문과 다른 이본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4. 사해 사본

성경의 역사를 밝혀 주는 발견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칠십인역은 성서의 원본과 후대의 편집본들 사이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는 사본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번역본이라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번역본을 통해 히브리어 원문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여전히 하고 있지만 완벽한 복원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칠십인역을 통해 대두되는 문제는 칠십인역이 대본으로 삼았던 히브리어 본문과 우리가 현재 주된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소라(특히 레닌그라드 코덱스) 본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필사나 번역 과정 상에서 나타났던 문제인지, 혹은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과 마소라 전통의 히브리어 본문이 처음부터 달랐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사마리아오경의 경우 종파적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임의적인 추가나 변형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고 여겨져 성서의 원본을 재구성함에 있어 이 사본의 중요성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본문들의 알 수 없는 관계가 바로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쿰란 주변에서 발견된 성서 본문들은 대부분 히브리어(자음 텍스트) 본문인데 놀랍게도 칠십인역과 유사한 본문,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 전통과 유사한 본문, 그리고 마소라 전통과 매우 가까운 본문들이 모두 발견되었다. 즉, 같은 신명기 두루마리라 할지라도 각기 다른 버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원-마소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원-70인역: 4번 동굴에서 발견된 출애굽기, 레위기
원-사마리아오경: 4번 동굴에서 발견되 고대 히브리어 문자 출애굽기
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성경 형성 과정의 한 가지 가능성은 쿰란/예수님 시대, 오경과 예언서의 경우 어느 정도 정경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각 본문이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소라 전통의 본문과 유사한 본문들은 쿰란 주변부 보다는 마사다 등지와 같이 유대 반란 중심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마소라 전통의 본문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통용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다른 전통의 본문들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히브리어 본문들은 사장되어 갔고, 결국 마소라 전통의 히브리어 본문이 선택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다양한 성서 본문 형태들은 당시 존재했던 권위의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까지만해도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체계적인 판단이나 규범은 정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나름대로 다양한 전통들을 모두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쿰란 공동체의 쿰란 동굴은 다양한 성경 전통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훌륭한 도서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성전 문서를 통해 성경을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경전을 재창조하려고 했던 시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이들은 이사야서 주석을 통해, 과거 앗수르의 위협을 현재화시켜 자신들의 메시아관과 종말론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려고 했다.
이러한 쿰란 공동체의 성서를 받아들이는 방식, “다양한 성서 판본의 수용", “성서의 재창조", 그리고 “성서 해석" 등과 같은 방향성은 기독교 전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음서는 삼분화된 히브리성서 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신약에 인용할 때에는 70인역의 번역을 인용하고 있으며, 구약에 근거하여 언약의 실현이라고 하는 신약이라는 새로운 경전을 재창조 하였고, 여기에는 또한 기독교 공동체의 시각과 신앙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성서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성서를 받아들였던 유사한 체계와 방식을 엿볼 수 있다.

2.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하기도 하고, 이에 대한 답을 얻기는 당장 불가능한 질문을 해 볼 때이다. 과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쿰란 공동체, 혹은 에세네파를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기록에서 에세네파의 규모가 4,000명 정도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커다란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활동했던 곳이 유다 광야이고,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 역시 유다 광야임을 생각해 볼때, 유대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쿰란 공동체를 과연 몰랐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약성서는 에세네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의 접점을 이룰만한 몇가지 요소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
광야
앞서 언급했듯이 세례 요한은 우선적으로 유다 광야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유다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며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대목은 쿰란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를 이사야 40:3에서 찾고 있다(마3:3; 막1:2-3; 눅3:4-6; 요1:12). 이는 우리가 앞선 강의에서 논의해 보았듯이 자신들의 사역의 근거를 이사야 40:3에서 찾았던 쿰란 공동체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1QS 8.12-15).
그러나 기독교는 광야에만 머물지 않았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의 사역지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즉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공간이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외딴 곳에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전파에 있었던 것이다.
세례
기독교의 신앙 입문 과정은 세례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3:3)라는 측면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죄사함"이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의 세례를 통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전을 떠나와 정결례를 행했던 쿰란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들 역시 물로 씻는 의식은 죄를 씻는 것을 의미했다(1QS 3.4-5.9).
물론 기독교에서의 세례는 쿰란 공동체의 정결례와는 다르다.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부활을 함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에서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시행하는 것이었고, 일상적으로 반복하여 정결례를 행했던 쿰란 공동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메시아
앞서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을 기다렸던 공동체이다. 이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물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메시아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메시아론은 또한 종말론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특별히 두 명의 메시아(1QS 9.9-11)를 기다렸다. 각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메시아들로 각기 다윗과 아론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 역시 메시아 신앙을 중심으로 하지만, 기독교 공동체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하였고, 또한 다시 오실 분이다. 즉, 현세적이고 종말론적인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그리고 두 명의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역할을 모두 가지신 한 분 메시아이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자, 또한 아론을 넘어선 멜기세덱의 반차로서의 메시아로 여겨지고 있다.
회원
그리고 공동으로 재산을 관리한다거나 공동으로 식사를 나누는 모습은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 모두에서 잘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를 통해 매우 긴밀한 공동체성이 강조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가 매우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기독교 공동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였다. 그리고 입회 조건도 쿰란 공동체에 비해 그리 까다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폐쇄성을 갖고 있던 쿰란 공동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앞에서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과연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 알고 있었을까? 본 강의자는 “침묵의 수사"(rhetoric of silence)를 이야기하고 싶다.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긍정도 부정도 표현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커다란 규모를 이루고 있었던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보았던 유사성에서 보았듯이 어느 정도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유사한 신앙적인 지향점을 공유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침묵은 또한 함께 갈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길을 지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던 쿰란 공동체와 그들의 운명,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떤 신앙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진정한 빛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누가복음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요한복음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