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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창조 이야기? (1) – 성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많은 성서학자들은 창세기에 두 개의 다른 창조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이 두 이야기들을 구분하여 이해해 왔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고, 필자는 두 이야기를 함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진행하기 전에 창세기 1장과 2-3장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글들을 몇 주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성서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이 질문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물어왔던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아마도 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서의 역사는 그만큼이나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때에는 성서를 종교 경전(Holy Bible)이 아닌 인문학의 용어인 성서 문학(Biblical Literature)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러한 관점의 이면에는 성서가 인간의 손길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는 입장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성서 내에 존재하는 모순, 중복, 변이 등을 발견하고 지적한다. 보수적인 종교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접근이 “불순”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예언자는 히브리어로 나비(נביא) 혹은 로에(ראה)라고 지칭되는데, 나비는 “부름 받은 자,”[1] 그리고 로에는 “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고,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혹은 듣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사람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계시(하나님의 말씀) —> 예언자 —> 예언(인간의 언어)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치환된다. 그런데 이 과정 가운데 예언자는 이 메시지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수사적인 장치를 도입할 수 있다. 예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운문” 형식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 예언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진 울림은 당시 선포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후대에 유사한 상황이 도래했을 때, 과거 예언자에게 직접 선포되었던 예언의 말씀은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각색되고, 확장되어 다시 선포되어 진다.
계시(하나님의 말씀) —> 예언자 —> A. 예언(인간의 언어) —> B. 예언의 확장(각색된 인간의 언어)
한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선포되고 되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설령 각색되고, 확장되었다고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서의 시대가 끝난 오늘날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시대인가?
성서는 위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위 도식의 A와 B가 결국은 한 성서 안에 정착되었고, 우리는 이를 읽는다. A와 B는 유사해 보이지만, B는 각색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A와 다른 특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가 모순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되풀이되고, 각 시대 상황과 신앙 환경에 따라 확장되기도 하고, 각색되어 왔다. 따라서 성서에 현미경을 들고 그 안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관점들, 서로 다른 시대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일관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의 형태를 구축할 때에는 각자 따로따로 전승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연결성을 띄게 되면서 창조로부터 종말에까지(구약-신약을 함께 생각해 본다면) 이르는 “일관된” 책이 되었다. 성서는 서로 다른 경험들과, 시각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모든 다양한 관점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계획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본다. 수천년의 과정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책으로 정착되었고, 또한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읽혀지고 있는 성서와 같은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성서의 형성 과정 이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언급했듯이, 성서는 일관성과 비일관성을 동시에 담지하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에 집중하는가이다. 성서 해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 주석가들과 기독교 교부들은 바로 성서가 가진 일관성에 집중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접근 방식 이면에는 당연히 종교적인 보수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오경이 모세,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음을 주장하며, 그들이 바라보는 성서의 일관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중세시대를 거쳐 계몽주의 사상이 유럽을 휩쓸면서 성서를 보는 시각도 달라지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인문주의 사상을 강조하며, 종교적 가치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사조였다. 특히 스피노자(Spinoza)는 성서 역시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 의해 쓰여진 책”이므로 종교적인 편견을 벗어 버리고 인문학의 관점에서 성서를 바라보아햐 한다고 주장했다.[2] 그러면서 그는 성서가 많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이제 냉철한 이성이라는 현미경을 성서에 들이대며, 성서가 갖고 있던 비일관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영향으로 프랑스 외과 의사였던 아스트룩(Astruc)은 성서가 갖고 있는 모순과 비일관성을 체계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했다.[3] 그가 처음으로 지적했던 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두 다른 이름들(יהוה과 אלהים)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 내에 다른 두 개의 전통이 존재함을 주장했고, 이러한 그의 이론은 뒤이어 후펠트(Hupfeld)와 그 유명한 벨하우젠(Welhaussen)의 “자료비평”(source criticism) 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성서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성서의 일관성과 비일관성.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성서가 두 가지 특징을 모두 담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는 완결된 책 뿐이다. 완결되기 이전의 성서가 어떤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성서의 비일관성을 통해 우리는 성서의 역사를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서의 최종 편집자(하나님)는 우리가 완결된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꿰면서 그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성서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따라서 필자는 비일관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일관적으로 꿰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성서를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어쩌면 비일관성으로 가득 찬 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우리에게 일관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섭리이다.
(계속)
[1] נביא의 정확한 어원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이견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נבא 어근이 아카드어 nabu (부르다, 이름짓다)와 관계되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비(נביא) 명사의 모음 패턴(a-i 아-이)은 “수동의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משיח(마시아흐. 기름부음 받은 자), נזיר(나지르, 성별된 자). 따라서 נביא는 “부름받은 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https://www.academia.edu/234681/1999_On_the_Etymology_and_Meaning_of_Hebrew_n%C4%81b%C3%AE%CA%BE
[2] Theologico-Political Treatise (1670)
[3] Conjectures sur les mémoires originaux dont il paroit que Moyse s’est servi pour composer le livre de la Genèse, Bruxelles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