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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2)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הים)으로 지음받았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이를 감사의 찬양으로 풀어낸 시편 기자의 고백을 찾아보자. 시편 8편은 하나님이 인간을 고귀하게 지으셨음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시편 8편에서 주되게 나타나는 모티프는 곧 “창조의 모티프”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3절에 나오는 달과 별, 그리고 7절과 8절에 나오는 생물들의 목록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의 목록이다. 그런데 시편 8편 기자의 관심은 바로 ‘사람의 지위’에 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다른 만물을 지배하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מעט מאלהים)*이기 때문이다. 메아트(מעט)라는 말은 성서에서 대체로 “매우 보잘 것 없이 작은 양”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지위와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양된 위치에 관한 이 개념은 바로 창세기 1:27의 기록,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와 관련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26에 보면 형상(צלם)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오는데 이는 개정 개역판 성경의 번역을 따르면 “모양”(דמות)이다. 사실 이 “모양”이라는 번역보다는 “유사한 모습”(likeness)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유사한 모습으로(시편: 조금 못하게)”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앞서 언급한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 ‘아트라하시스’의 노예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인간관과 근원적으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신들의 노역을 대신 하는 “노예”의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통치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
이 세상의 많은 창세신화는 그 신화를 생성해 낸 국가 혹은 사회의 통치자들의 통치 체제를 공고히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 근동 신화 아트라하시스 역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노예”로 규정함으로 계급 질서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정치적인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이 사회 내에서 우리의 지위가 어떻든 간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하나님과 유사한 모습)”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눈여겨 볼 또 하나의 구절은 창세기 5:3이다. 5:1-2에서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다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을 언급한다. 그리고 3절에서 아담이 셋을 나을 때 “자신과 유사한 모습, 곧 자신의 형상(בדמותו כצלמו)”과 같은 아들 “셋”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유사한 모습)으로 아담이 만들어지고, 아담이 곧 그의 형상(유사한 모습)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어갔다는 것이다.*** 비록 인류 두 번째 세대인 가인과 아벨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셋을 통해 새로운 축복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족보의 기능에 관해서 앞으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 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쩰렘(צלם)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일컫는 말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이라는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된다(민33:52; 겔7:20 등).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생각해서 만든 형상이지만 그것은 생명 없는 공허한 형상, 즉 우상에 지나지 않았다. 우상 숭배는, 정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신의 가치를 깍아내리고 생명없는 허상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지위와는 상관없이 우리 자신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명예라는 우상을 던져버리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답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מאט מאלהים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βραχύ τι παρ᾽ ἀγγέλους)로 번역했다. 이전 한글 번역인 개역판과 몇몇 영어 성서들도 이런 번역을 따랐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져서 고쳐진 번역이라 생각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אלהים이 다른 “이방신”을 의미하는 경우는 많이 나타나지만, 본래 천사를 가리키는 말인 מלאך와 혼용되는 경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문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편 8편의 전체적인 모티프가 창조 이야기인 창세기 1장과 매우 유사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Joshua Berman, Created Equal, (New York: Oxford, 2008), 22.
**Kenneth A. Matthews, Genesis 1-11:26,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1A , (Nashville: B&H Publishing Group, 1995), 170.